내가 사랑한 구이저우(贵州) [8] 구이저우 요리 – 혀끝에 남는 여행의 기억
내가 사랑한 구이저우(贵州)
[목차]
[1] 들어가며: 조용한 감동의 땅, 구이저우로의 여행
[2] 구이저우 지역은 어떤 곳인가?
[3] 내가 여행한 구이저우성
(1) 구이양(贵阳): 변화와 전통의 교차로
(2) 황과수 폭포(黄果树瀑布群): 자연이 빚어낸 걸작
(3) 서강천호묘채(西江千户苗寨): 소수민족의 삶 속으로
(4) 여파소칠공 풍경구(荔波小七孔): 아열대의 숨결
(5) 진원고진(镇远古镇): 강 위의 역사를 걷다
(6) 범정산(梵净山): 신성한 자연의 세계
[4] 구이저우의 요리
[5] 구이저우를 여행하는 이들에게 여행 팁
[6] 맺으며: 구이저우가 내게 남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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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구이저우 요리 – 혀끝에 남는 여행의 기억
여행의 끝자락에서 가장 선명하게 남는 기억은 종종 '맛'입니다. 구이저우의 맛은 그 땅의 역사와 자연, 사람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든 풍경과도 같습니다. 한 입 머금으면, 그 순간 내가 서 있었던 골목과 사람들의 표정, 들녘을 따라 이어진 계단식 논과 비 내리던 고진의 풍경이 함께 떠오릅니다.

구이저우 요리(贵州菜), 또는 첸차이(黔菜)는 중국 8대 요리계열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쓰찬 요리의 계통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합니다. 구이저우 요리는 지역성과 민족성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이뤄낸 고유한 향토 요리입니다. 묘족, 부이족, 동족, 수이족 등 다양한 소수민족의 전통 조리법이 융합되어 발달했으며, 그 특색 있는 조미 방식과 향신료 사용은 중국 내에서도 독특한 스타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구이저우는 교통이 불편하고 내륙 깊숙한 산악지대에 위치해 있어 외부 영향이 제한된 반면, 지역 내 다양한 민족 간의 음식 문화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강한 향신료, 절임, 발효 기술이 널리 퍼졌으며, 이는 보존과 기호 모두의 측면에서 발전해 왔습니다.
구이저우 요리의 가장 큰 특징은 매운맛과 신맛의 조화입니다. 사천의 마라(麻辣), 호남의 샹라(香辣)와 더불어 '쏸라(酸辣)'의 대표 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단순히 취향의 문제가 아닌 기후적 요인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비가 많고 습한 기후는 발효와 절임에 유리하며, 매운 향신료는 몸의 습기를 줄이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에 일상 식생활에 깊이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구이저우 사람들에게 신맛이 단순한 맛의 범주를 넘어 생존과 건강의 핵심 요소로 인식된다는 점입니다. 과거 이 지역은 소금이 매우 귀해 식생활에서 신맛을 통해 체력 보충을 꾀했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3일 동안 신맛을 먹지 않으면 걷기도 어렵다(三天不吃酸走路打窜窜)"는 속담이 존재합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구이저우 소수민족들 사이에서 신맛을 에너지 공급원으로 여겼던 오랜 경험이 축적된 문화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신맛 음식이 피로 회복이나 더위 극복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7세기 명나라 말기부터 외래 작물인 고추가 양쯔강을 통해 들어와 쓰촨, 후난, 구이저저우 지역에 유입되었고, 시간이 지나며 현지에서 재배되는 다양한 품종의 고추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구이저우에서는 고추기름, 절임 고추, 생고추, 말린 고추 등 다양한 형태로 매운맛을 구현하며, 여기에 식초 또는 발효 톡 쏘는 맛이 더해져 구이저우만의 강렬하고 독특한 맛을 만듭니다.
중국 내에서도 구이저우 요리는 '가장 입에 자극적인 요리'라는 평을 듣습니다. 사천 사람들이 "매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호남 사람들은 "매워도 꿋꿋이 먹는다", 그리고 구이저우 사람들은 "맵지 않으면 불안하다(怕不辣)"고 할 정도로, 이곳 사람들의 매운맛 사랑은 유명합니다.
또한, 구이저우 요리는 대중성과 다양성도 갖추고 있어, 길거리 음식부터 연회 요리까지 폭넓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신맛 생선탕(酸汤鱼)', '또화미엔(豆花面)', '양고기 쌀국수(羊肉粉)', '궁보계정(宫保鸡丁)', '도한닭(盗汗鸡)' 등은 맛뿐만 아니라 지역 문화를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요리로 손꼽힙니다.
‘카이리 신맛 생선탕(凯里酸汤鱼)’은 구이저우의 대표 음식이자 묘족 요리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전통 탕 요리입니다. ‘카이리’는 구이저우성 동부에 위치한 묘족 중심 도시로, 이 지역은 발효 음식을 오랜 세월 즐겨온 식문화로 유명합니다. 이 생선탕은 바로 그 카이리에서 시작되어, 이제는 구이저우 전역으로 퍼진 대표 음식이 되었습니다.


이 요리의 핵심은 바로 ‘쑤안탕(酸汤, 신맛 국물)’입니다. 찹쌀과 토마토를 발효시켜 만든 국물은 발효의 깊은 풍미와 독특한 산미를 자아냅니다.
묘족 가정에서는 이 쑤안탕을 매일 소량씩 만들어 항아리에 저장해두고 필요할 때 꺼내어 사용합니다. 발효 기간에 따라 신맛의 정도가 달라지며, 묘족의 가정에서는 자신의 손맛을 자랑하듯 이 국물의 깊이와 향을 소중히 여깁니다.
탕에 들어가는 생선은 주로 잉어나 메기와 같은 담수어로, 손질 후 얇게 포를 떠서 신맛 국물에 담가 끓입니다. 생선 살의 부드러움과 국물의 새콤하고 얼큰한 맛이 어우러져 입안을 감도는 풍미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여기에 고추기름, 마늘, 생강, 파, 향신채 등이 들어가며, 취향에 따라 묘족 특유의 발효 두부나 버섯, 곡물가루 등을 더하기도 합니다.



신맛 생선탕은 명절이나 가족 모임, 손님 접대 시 빠지지 않는 고급 요리로, 단순히 ‘음식’이 아니라 묘족의 전통과 정성이 녹아든 하나의 문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요리는 요즘에는 대중식당에서도 쉽게 맛볼 수 있으나, 시골 마을의 가정에서 손수 담근 신맛 국물로 만든 생선탕은 특별한 향과 깊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입맛에는 생소할 수 있는 신맛이지만, 마치 아주 신 김치찌개나 똠양꿍처럼 먹을수록 입에 감기며, 특히 기름진 요리에 지쳤을 때 한 그릇 먹으면 속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줍니다. 묘족 사람들은 ‘3일 동안 신 것을 먹지 않으면 걸을 수도 없다’는 속담을 남길 만큼 이 신맛을 삶의 활력으로 여겨왔습니다.
따라서 구이저우 여행 중 이 신맛 생선탕을 맛보는 일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이곳 사람들의 삶과 철학, 그리고 역사까지 함께 음미하는 귀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또화미엔(豆花面): 구이저우 준이(遵义) 지역에서 유래한 전통적인 아침 식사 메뉴로, 따뜻하게 데운 부드러운 두부(두화)와 쫄깃한 밀가루 국수를 한 그릇에 담아 제공합니다. 여기에 고추, 파, 마늘, 생강, 된장, 간장 등으로 양념한 다진 돼지고기 볶음 고명이 듬뿍 얹히고, 별도로 제공되는 매운 양념장이나 고소한 땅콩소스를 섞어 먹으면 더욱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국수와 두화는 따뜻하게 제공되며, 양념장의 조합에 따라 구수하면서도 칼칼한 맛이 입맛을 돋웁니다. 1958년 덩샤오핑이 준이를 시찰할 당시 이 음식을 직접 맛보고 칭찬한 일화로 유명세를 얻게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여행객들이 아침 식사로 꼭 찾는 음식 중 하나입니다.
한 그릇으로 아침을 든든히 시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지역민들의 소박한 삶과 맛의 감성을 함께 체험하는 소중한 음식 문화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입맛에도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 구이저우 요리는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 이 지역 사람들의 삶과 환경, 역사, 문화를 오롯이 담아내는 '먹는 민속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행자에게 있어 이 맛을 경험한다는 것은 곧 구이저우를 깊이 이해하는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양고기 쌀국수(羊肉粉): 구이저우 전역에서 사랑받는 국민 음식으로, 특히 준이(遵义), 수이청(水城), 금사(金沙), 흥이(兴义) 등 지역마다 고유의 조리법을 가진 대표적인 쌀국수입니다.
'미펀(米粉)'이라 불리는 쌀로 만든 얇고 탄력 있는 면발에 양고기를 듬뿍 얹고, 신맛을 내는 육수에 각종 향신료와 고추기름을 더해 깊은 풍미를 자아냅니다. 양고기는 얇게 저며 부드럽게 익히며, 특유의 향신료와 함께 끓여내 잡내 없이 감칠맛이 일품입니다.
지역마다 차이를 보이지만 대체로 고수, 파, 마늘, 고추 등을 곁들여 진한 육수와 함께 제공됩니다. 기온이 낮고 습한 구이저우의 기후 속에서 몸을 덥히기 위한 음식으로 발전해왔으며, 하루 세 끼를 이 국수로 해결하는 이들도 있을 만큼 현지인들에게는 일상 그 자체인 음식입니다.
구수하고 얼큰하며 묘하게 중독성 있는 맛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특히 맵고 시큼한 맛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입맛에도 잘 맞아, 여행 중 한 끼 식사로 강력히 추천할 수 있는 메뉴입니다.

궁보계정(宫保鸡丁): 중국 전역에서 사랑받는 대표 닭요리 중 하나로, 구이저우에서 시작된 요리가 사천 지방을 거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 요리의 이름은 청나라 시기의 구이저우 관리인 '딩바오전(丁宝桢)'이 사천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만들어졌는데, 그의 관직 이름인 '궁보(宫保)'에서 유래해 '궁보계정'이라 불립니다.
주사위 모양으로 썬 닭고기에 고추, 마늘, 생강, 땅콩을 넣고 매콤달콤하게 볶아내며, 구이저우 스타일은 특히 고추를 많이 사용해 매운 맛이 강하고, 구이저우 특유의 신맛 양념인 '츠바(糍粑辣椒)'를 더해 강렬한 산미와 매운맛이 공존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고소한 땅콩과 함께 씹히는 닭고기의 식감, 매콤새콤한 양념이 어우러져 중독성 있는 맛을 자랑하며, 밥과 함께 먹기에도 탁월한 요리입니다. 오늘날에는 사천식 궁보계정이 더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뿌리는 구이저우에 있음을 많은 미식가들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도한닭(盗汗鸡): '땀을 흘리는 닭'이라는 뜻의 이 요리는 구이저우 지역의 전통 보양식으로, 특별한 찜 솥인 '도한냄비'를 사용하여 조리합니다.
도한냄비는 4단 구조로 구성되어 있어 물을 넣지 않고도 재료에서 나온 수분으로 음식을 찌는 방식인데, 이때 생기는 국물이 마치 닭이 땀을 흘리듯 모인다 하여 '도한닭'이라 불립니다. 주 재료는 닭고기이며, 여기에 인삼, 대추, 생강, 양상추 등 다양한 한방 재료와 채소를 넣어 찌며, 국물은 진하고 향긋하며 자극적이지 않아 몸을 따뜻하게 덥혀주는 느낌을 줍니다.
영양 보충이 필요할 때나 귀한 손님 접대, 명절 음식으로 자주 등장하며, 한국의 삼계탕과 유사한 조리 방식으로 인해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감칠맛을 전달합니다. 깊고 부드러운 맛과 함께 건강에 좋다는 인식으로 인해 특히 중장년층과 여성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높습니다.

음식은 단순한 포만감을 넘어서, 기억을 남기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언어입니다. 구이저우의 음식은 그들이 살아온 시간과 환경, 민족의 고유한 삶의 방식이 응축된 맛이기에 더욱 특별합니다. 혀끝에 남은 그 시큼하고 매운 맛은, 내가 구이저우를 다녀왔다는 가장 생생한 증거이자, 언젠가 다시 그곳을 떠올리게 하는 ‘맛의 기억’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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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소개
김일권
한국에서 기업인으로 30년을 살아온 평범한 직장인.
중국에서 17년을 근무하며 중국 각지의 숨은 매력을 여행자로서, 때론 현지인처럼 살아보며 경험했다.
특히 구이저우에서의 여행은 인생의 속도를 잠시 늦추고 삶의 깊이를 다시 돌아보게 해준 특별한 여정이었다.
이 책은 그의 다섯 번째 중국 여행 에세이이자, 진심으로 전하는 ‘느림의 미학’이다.
김일권 여행작가 / 중국어 관광통역안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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